와인 마시는 이쇼리입니다.
와인을 자주 마시다보니 많은 질문들을 받곤 하는데, 그 중 높은 빈도로 등장하는 질문이 바로 '와인 브리딩'이 필요한지를 묻는 내용입니다. 내가 어떤 와인을 샀는데, 이 와인을 브리딩할 필요가 있느냐 이런 취지의 질문입니다.
1.와인 브리딩은 무엇일까
먼저 와인을 브리딩한다는 개념부터 뭔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리딩은 한 마디로 와인의 코르크를 열어서 공기와 접촉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서 브리딩은 영어의 Breathing, 즉 '숨 쉬게 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해석이 '숨 쉬게 하다'이다보니, 꼭 금단의 마법 주문같은 느낌을 줍니다. 브리딩만 하면 아무리 형편없는 와인이라도 공기와 접촉해서 숨을 쉬게 만들어서 맛 좋게 만든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브리딩이라는 말 뜻 때문에 오해가 굉장히 많은데, 브리딩 대신 '산화 유도'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보시면 좋습니다. 훨씬 중립적인 표현이고, 마법 주문같은 환상도 들지 않습니다.
2.브리딩의 본질은 '산화 유도'
와인은 태생적으로 산화를 향해 달려가는 제품입니다. 코르크를 열지 않더라도 병 속에서 서서히 산화가 일어나고 좀 빠른 와인같은 경우는 불과 몇년 만에 산화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산화라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국제 와인 교육과정인 WSET에서는 브리딩에 대해 '불필요한 행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와인 서빙 전 병을 미리 따 두는 것은 공기 접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노출 면이 너무 적어서 효과를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이 정확한 게 브리딩을 해봐야 고작 100원짜리 동전면 정도만 공기와 접촉하게 됩니다. 산화는 접촉면이 넓을수록 보다 빠르게 일어나는데, 100원짜리 동전면을 접촉해봐야 산화의 효과는 극도로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일부 와인 애호가 중에서는 '코르크를 따고 4~5시간 정도를 놔둬서 브리딩을 유도한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는데,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100원짜리 동전면을 4~5시간 놔둬봐야 산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3. '와인을 2~3잔 정도 따른 뒤 접촉 면적을 넓혀서 브리딩을 한다'?
2~3잔 정도 따라놓으면 훨씬 넓은 면적에서 공기와의 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에, 브리딩의 효과가 있지 않겠냐는 의견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썰이 존재하지만, 저는 이것조차 불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접촉면을 넓혀서 산화를 촉진시킬 순 있겠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다 무엇보다 똑같은 효과를 와인잔에서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놓은 뒤, 몇 차례 흔드는 행동 만으로도 브리딩에서 기대하는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2~3잔을 따라놓고 기다리는 행위가 의미가 있을지는 몰라도, 극도로 효율이 떨어지는 행동이라는 뜻도 됩니다.
4. 내가 브리딩을 해봤는데 달라지는 게 있었다는 분들께
셋 중 하나입니다.
우선 브리딩은 보통 1시간 이상 하라는 분들이 많은데, 1시간이면 와인의 온도가 굉장히 많이 올라갑니다. 상황마다 좀 다르겠지만 보통 2도에서 5도 이상까지 올라가는 편입니다. 온도가 올라가면 향 분자의 활동이 활발해져서 아로마가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풍미가 매우 짙은 풀바디 레드 와인을 상온(16도)에서 서빙해야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테이스터가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발생한 풍미의 변화를 마치 '브리딩에 의해 벌어진 것처럼' 착각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다음으로 알코올이 낮아짐에 따른 풍미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와인은 기본적으로 술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매우 빠른 속도로 알코올이 날아가버립니다. 알코올은 와인의 풍미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알코올이 빠지면서 와인의 맛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 자체는 맞습니다. 하지만 이게 '좋은 방향'으로 바뀐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인지부조화를 들 수 있습니다. 보통 와인 경험이 많은 분들에게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브리딩에 대한 워낙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와인의 맛이 달라진다'는데 대한 어떠한 의구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맛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달라졌다'고 스스로 납득해버리는 인지부조화가 발동하는 경우,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경험은 강력한 무기지만, 때로는 거꾸로 눈을 멀게 만들기도 하는 법입니다. 일종의 플라시보 이펙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와인과 심리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2020년 5월 발행된 '와인 심리학'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여기선 와인과 관련된 굉장히 많은 심리적 요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와인 가게에 클래식이 나오면 더 많은 지출이 발생한다
프랑스 음악이 매장에 나오면 프랑스 와인을, 독일 음악이 매장에 나오면 독일 와인을 사는 경향이 있다
같은 와인이라도 휴일에 마신 와인이 퇴근 뒤 마신 와인보다 맛있다고 느낀다
5. 와인, 그냥 드시면 됩니다
정말로 브리딩이 필요한 와인이 있기는 합니다. 어떤 경우냐면 '리덕션'(환원)에 따른 불쾌한 향이 올라오는 와인이 그렇습니다. 이 경우는 와인을 열어둔 다음에 좀 놔둬서 환원취를 날아가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브리딩이 필요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브리딩은 아니지만 디캔팅이 필요한 와인은 있습니다. 초장기숙성형의 와인을 급속 산화시킨다던지, 너무 오래된 와인이라서 와인 내의 찌꺼기를 걸러낼 필요가 있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매우 고가의 와인을 마시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신있게 말하건대 거의 90% 이상의 일반적으로 즐기는 와인은 브리딩이 필요 없습니다.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는 예시가 바로 유명 유튜버 '와인킹' 채널입니다.
브리딩을 주제로 영상이 나온 적은 없지만, 여러 영상에서 보면 브리딩을 하는 와인은 거의 없습니다. 간혹 디캔팅을 하는 와인이 몇번 나오기는 했지만(5대샤토 등), 디캔팅이 아닌 브리딩을 진행한 와인을 본 적이 있으신지 되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와인은 브리딩은 물론 디캔팅조차 필요없는 와인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숨을 쉬게 한다'는 마법같은 주문 때문에 괜히 아까운 본인의 브리딩용 시간을 날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국내 최고 와인 전문가 중 하나인 김준철 선생님의 기고글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탈리아 명품와인 가야(Gaja)의 와인메이커 '구이도(Guido Rivella)'는 "1940년대 바롤로나 바르바레스코의 라벨을 보면
마시기 몇 시간이나 하루 전에 뚜껑을 따두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당시 와인에서 나는 악취의 95%가 병 안에서 불완전한 말로락틱 발효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와인을 저장하는 장소의 온도가 높으면 병 안에서 이 발효가 잘 일어났다."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 에드워드 스타인버그의 『산로렌조의 포도와 위대한 와인의 탄생(박원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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